게임의 역사?

2008. 11. 6. 14:54
국내에 처음으로 컴퓨터 게임이 알려지기 시작하게 된 것은 1978년, 일본 아케이드 게임들이 국내로 대량 유입되면서 부터이다. 이 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자 오락실이라는 것이 처음 나타나게 되었고 1982년에 이르러 급속도로 전자 오락실이 전국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게임은 콘솔, PC, 온라인, 모바일 게임 등으로 플랫폼이 다양화 되면서 변화해 왔고, 현재에 와서는 컴퓨터를 비롯한 미디어 도구들이 발달하면서 게임이 진화하고 게임이 발전하면서 미디어 도구도 진화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미디어 도구와 게임이 평행선 상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일상 생활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컴퓨터나 휴대폰 등을 통해 게임을 쉽게 접하면서 게임을 즐기는 인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게임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처음 만들어지게 되었고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즐거움을 찾기 위해 플레이 하고 있는 게임의 역사와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일화들을 하나씩 꺼내 살펴보도록 하자.

세계 최초의 컴퓨터 게임은 스포츠 게임?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세계 최초의 게임1958년 오실로스코프와 아날로그 컴퓨터 기반으로 만들어진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 미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히긴보섬(William Higingbotham)에 의해 만들어진 테니스 포 투는 최초로 그래픽 디스플레이를 사용한 컴퓨터 게임으로써 비디오 게임 역사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히긴보섬이 테니스 포 투를 만들게 된 동기는 그가 일하던 국립 브룩헤이븐 연구소(미국 원자핵 물리학 연구소)를 찾는 방문자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고 핵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기 위함이었다.

테니스 경기를 기본으로 한 테니스 포 투는 후에 널리 알려진 비디오 게임들 중 하나인 퐁(1972년, 아타리)에 영향을 주었다. 테니스 포 투는 퐁과 비슷한 시기의 게임들과 다르게, 화면에 플레이어를 표시하지 않았고 상하 시점 대신 간소화된 측면 테니스 코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은 중력에 영향을 받았으며 네트를 넘기는 플레이를 했다. 테니스 포 투는 대부분이 저항과 콘덴서, 계전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날로그 컴퓨터로 조작을 했으며, 공을 칠 때에는 트랜지스터 스위치를 사용했기 때문에 소음이 큰 단점이 있었다.

그 후 1961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게임스페이스워!(Spacewar!)가 나오게 되었다.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스티브 러셀(Steve Russell)과 마틴 그랫츠(Marton Graetz)가 웨인 위터넨(Wayne Wiitanen)과 함께 MIT에 있는 DEC PDP-1을 사용해 볼 목적에 게임으로 착안해 냈다. 1962년 2월, 앨런 코톡(Alan Kotok)과 스티브 러셀에 의해 최초의 버전이 나오기 까지는 대략 200여시간이 들어갔고 부가적인 것들은 댄 에드워즈(Dan Edwards)와 피터 샘슨(Peter Samson), 마틴 그랫츠에 의해 개발되었다.


▲ 최초의 컴퓨터 게임인 테니스 포 투 (좌) / 스페이스워! (우)


비디오 게임 산업의 태동, 게임의 상업화

스페이스워!의 계보를 이은 게임이 갤럭시 게임(Galaxy Game)으로 최초의 동전 투입식 비디오 게임이었다. 갤럭시 게임은 게임으로써는 처음 대량 생산되었던 컴퓨터 스페이스(1971. 11, 넛팅 조합)가 출시되기 2개월 전인, 1971년 9월에 스탠포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에 있는 트레시더 연합(Tresidder Union)에 단 1대가 설치되었다.

갤럭시 게임은 빌 핏츠(Bill Pitts)와 허그 턱(Hugh Tuck) 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었고, 컴퓨터 스페이스와 마찬가지로 갤럭시 게임은 스페이스워!의 뒤를 이은 작품이었다. 벡터 디스플레이가 달린 디지털 PDP-11/20로 구성된 기계의 가격은 약 2만 달러였고, 1회에 10센트, 3회에는 25센트였다.

갤럭시 게임은 1979년 5월에 철거되기 전까지 많은 대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으며, 이 기계는 1997년에 복원되어 현재 캘리포니아(California), 마운틴 뷰(Mountain View)에 있는 컴퓨터 역사 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갤럭시 게임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 컴퓨터 스페이스(Computer Space)로 넛팅 조합(Nutting Associates)에 의해 스페이스워!가 리메이킹되어 1971년 11월에 출시되었다. 후에 아타리를 창립한 놀런 부시넬(Nolan Bushnell)과 테드 댑니(Ted Dabney)에 의해 만들어진 컴퓨터 스페이스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동전 투입식 비디오 게임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마그나복스 오디세이(1972, 랄프 베어)보다 6개월, 퐁(1972, 아타리)보다 1년이나 앞선 최초의 상용 비디오 게임이었다.


▲ 최초의 동전 투입식 비디오 게임인 갤럭시 게임 (좌) / 컴퓨터 스페이스 (우)

그 뒤를 이은 것은 아타리(Atari)가 설립된 뒤 1972년 9월에 동전 투입식 아케이드 게임으로 출시된, 1세대 비디오 게임(Pong)이었다. 퐁은 탁구 경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으며 공을 칠 때 회로에서 발생되는 소리 때문에 퐁이라고 명명되었다. 그 당시 퐁이라는 단어가 라켓과 공을 사용하는 비디오 게임의 한 장르를 가르키는 이름으로 사용될 때 아타리는 퐁을 상표로 등록했다.

보통 사람들은 퐁이 세계 최초의 상용 비디오 아케이드 게임으로 알고 있지만, 아타리를 설립하기 전인 놀런 부시넬과 테드 댑니에 의해 1971년에 출시된 넛팅 조합의 컴퓨터 스페이스가 최초였다. 물론 퐁은 아케이드와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최초로 널리 인기를 얻은 비디오 게임이었으며,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 선두주자의 역할을 한 게임이었다.

아타리 창립자, 놀런 부시넬
- 70만 달러로 게임특허 산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


1972년, 발명가였던 랄프 베어(Ralph Baer)는 영상처리 장치를 이용한 게임 특허를 미국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그에 의해 개발된 제1세대 비디오 게임기이자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기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Magnavox Odyssey)가 판매되었다. 발매 당시 랄프 베어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아타리의 창시자인 놀런 부시넬이 내놓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이 발매되면서 손해를 보게 되었다.

랄프 베어는 이에 대해 특허를 침해당했다며 법원에 고소를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놀런 부시넬이 그 당시의 미화 70만 달러로 게임 특허를 구입하겠다고 제시하자, 랄프 베어는 게임 시장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비디오 게임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해서 놀런 부시넬은 돈방석 위에 앉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랄프 베어 (좌) / 놀런 부시넬 (우)


퐁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장르의 여러 게임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알카노이드와 같은 벽돌깨기 게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브레이크아웃(Breakout)이 아타리(Atari)에 의해 1976년 5월 13일 대중들에게 소개되었다. 브레이크아웃은 퐁의 영향을 받았고 놀런 부시넬(Nolan Bushnell)과 스티브 브리스토우(Steve Bristow)에 의해 체계가 잡히게 되었다. 후에 비디오 게임기로 이식되었고 슈퍼 브레이크아웃(Super Breakout)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또한 브레이크아웃은 책과 비디오 게임, Apple II 등의 기초가 되는 많은 영감을 주었다.


▲ 아타리의 선봉장이었던 (좌) / 벽돌깨기의 원조, 브레이크아웃 (우)


비디오 게임의 변화는 슈팅에서부터..

1970년대 아타리의 여러 게임들을 시작으로 다양한 비디오 게임들이 물 밀듯이 쏟아져 나왔고 이러한 게임 시장에 처음 변화를 준 것이 Apple PC가 나온 해인 1978년에 출시된, 토모히로 니시카도(Tomohiro Nishikado)에 의해 디자인, 2차원 그래픽을 채택한 최초의 슈팅 게임 중 하나였던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였다.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일본에서 타이토(Taito)에 의해 처음 제작되어 판매되었고, 후에 밸리 미드웨이에 의해 북미에서 판매되었다.

니시카도는 게임을 디자인할 때, 브레이크아웃(Breakout), 우주 전쟁(The War of the Worlds), 스타워즈(Star Wars) 등 인기 있는 여러 미디어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또한 그는 게임 제작에 사용할 커스텀 장치와 개발 툴도 직접 디자인 했었다. 비록 오늘날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이 되었지만, 이 일들은 현대 비디오 게임의 선구자적인 역할이었으며 세계 산업에서 비디오 게임 산업이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처음 출시되었을 때에는 일본 100엔 짜리 동전의 순간 부족 현상을 가져올 정도로 매우 성공적이었고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많은 인기를 끌며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어 최고로써 인정받은 아케이드 게임이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다른 비디오 게임들에게 자극이 되어 수많은 플랫폼으로 재출시 되었고 여러 후속작을 낳았으며 비디오 게임기를 위한 최초의 킬러 앱(Killer app, 은어: 새로운 기술 보급에 결정적 계기가 되는 Application)이 되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다양한 TV 쇼에서 언급 되었고 여러 비디오 게임과 문화 전시회의 참가 자격도 주어질 정도였으며, 게임에 등장하는 적 외계인은 비디오 게임 전체를 상징하는 미디어 아이콘이 되기도 했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뒤를 이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갤러그의 전신갤럭시안(Galaxian)이 1979년 일본에서는 남코(Namco)에 의해, 미국에서는 미드웨이에 의해 출시되었다.

갤럭시안은 스페이스 인베이더에 구현된 시스템들보다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갤럭시안은 플레이어 뿐만 아니라 적들도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이 특징이었고 적들이 주기적으로 자폭 공격을 시도하는 요소도 추가되었다.

갤럭시안은 남코에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보통 최초의 슈팅 게임으로 소개되고는 했다. 비록 트루 컬러가 1975년경 선보였지만, 갤럭시안은 한 단계 발전된 다양한 색상의 그래픽과 무가공의 테마 음악, 점수에 사용된 색다른 폰트, 발전된 배경 음악과 스크롤되는 우주 배경, 그리고 남은 비행선과 통과한 라운드 수를 보여주는 그래픽 아이콘 등을 포함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팩맨과 같은 1980년대의 다른 수많은 아케이드 게임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 타이토의 명작, 스페이스 인베이더 (좌) / 갤러그의 전신, 남코의 갤럭시안 (우)


비디오 게임 산업의 확장과 캐릭터 산업

이런 게임 시장에 또 다른 변화와 성과를 가져온 시기는 닌텐도에서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게임&워치를 발매한 1980년이었다.

1980년 5월 22일 일본에서 남코(Namco)에 의해 개발, 출시되고 미드웨이에 의해 미국에 배포된 팩맨(Pac-Man). 그 당시 비디오 게임이라고 하면 팩맨을 떠올릴 정도였고 팩맨은 1980년대 대중 문화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다. 또한 팩맨의 출시로 팩맨은 음악과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는 캐릭터 상품화 현상도 가져왔다.

팩맨이 출시되었을 때, 북미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은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와 디펜더(Defender), 또는 아스테로이드(Asteroids)와 같은 우주를 배경으로한 슈팅 게임이 주류였고, 극소수만이 퐁에서 파생된 몇몇 게임들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팩맨은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남녀 모두에게 인기를 끌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팩맨은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고금의 가장 유명한 아케이드 게임 중 하나로 기억되었다.

갤럭시안의 후속작으로 1982년 국내에서 '뿅뿅'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인기의 슈팅 아케이드 게임인, 갤러그(Galaga)가 1981년 남코(Namco)에 의해 출시되었고 미드웨이에 의해 같은 해 미국 버전이 출시되었다. (이 해는 IBM-PC가 출시된 해이기도 했다.)

갤러그는 플레이어의 비행선이 폭발했을 때 발생하는 사실적인 폭발음, 게임이 끝났을 때 플레이어의 결과값 합산, 매 4판마다 주어지는 보너스인 챌린징 스테이지, 플레이어에게 미사일을 쏘지 않는 상태로 화면 안팎을 날아드는 적들과 같은 전신인 갤럭시안보다 더 많은 새로운 요소들이 도입되었다.


▲ 남코가 만들어낸 두 편의 명작, 팩맨 (좌) / 갤러그 (우)

같은 해인 1981년, 닌텐도(Nintendo)에 의해 개발된 동키 콩(Donkey Kong)이 출시되었다. 동키 콩은 주인공이 장애물을 피하면서 층을 올라가는 방식인 새로운 층구조 장르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마리오'로 잘 알려진 점프맨은 동키 콩이란 이름의 거대한 원숭이로부터 위험에 처해있는 공주, 파울린을 구출해야 하는 이야기로 스토리라인은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그 시절에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 때부터 영웅, 마리오와 악당 원숭이, 동키 콩은 닌텐도의 인기 캐릭터가 되었다.

그 당시 닌텐도의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Hiroshi Yamauchi)는 미야모토 시게루(Shigeru Miyamoto)라는 최초의 게임 디자이너에게 프로젝트를 선임했다. 뽀빠이(Popeye)와 킹콩(King Kong)에서 폭 넓은 영감을 받고 둘을 혼합해서 구상해낸 미야모토는 닌텐도의 엔지니어 팀장, 요코이 군페이(Gunpei Yokoi)와 함께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디자인했다. 두 사람은 특징 부여의 의미로써 그래픽을 사용했고 게임의 줄거리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컷 씬을 포함시켰으며, 게임플레이 속에 다수의 스테이지를 넣으면서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발매 당시, 닌텐도 미국 지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동키 콩은 북미와 일본에서 엄청나게 큰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미야모토의 캐릭터는 시리얼 과자 상자와 TV 만화를 비롯해 그 외의 수많은 다른 곳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이 때 유니버설 스튜디오스(Universal City Studios)는 동키 콩이 그들의 상표인 킹콩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법정 공방으로 끌고갔지만 이길 수 없었다. 이런 동키 콩의 성공과 법정에서의 닌텐도 승리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 닌텐도가 우위를 점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닌텐도의 급부상을 예고한 동키 콩의 타이틀 화면 (좌) / 플레이 화면 (우)


1982년 - 비디오 게임계의 대사건, 아타리 쇼크 (Atari Shock)

1977년 아타리(Atari)에 의해 미국에서 발매된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2600 VCS(Atari 2600 Video Computer System)은 게임기에 내장되어 있던 게임 소프트의 프로그램 롬을 카트리지로 분리해 외부로부터 공급할 수 있도록 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또한 아타리는 VCS의 프로그램을 공개해 누구라도 자유롭게 게임을 개발하고 판매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다. 1976년, 아타리 2600 VCS를 발매하기 위해 아타리의 창립자 놀런 부쉬넬(Nolan Bushnell)은 미화 2800만 달러에 워너 커뮤니케이션(Waner Communication)에 회사의 주식을 매각하게 되는데, 1977년 VCS 발매 후 부진을 겪으면서 놀런 부시넬과 워너 커뮤니케이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고, 결국 1978년 최대주주 워너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놀런 부시넬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1979년 겨울, 일본 타이토(TAITO)의 인기작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eders)를 시작으로 남코(Namco)의 인기작들이 미드웨이(Midway)에 의해 북미에 발매되면서 1980년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렇게 게임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이끌린 많은 개발자들이 뛰어들면서 누구에게든 오픈되어 있던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2600 VCS의 취약점이 큰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곧 게임 시장에는 질 낮은 게임들이 넘쳐나게 되고 이에 따라서 소비자들은 게임에 흥미를 잃어 갔다. 또한 그 파급 효과로 게임 개발사의 도산과 함께 헐값 처분된 게임들이 시장에 흘러들어 오면서 시장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타리는 자신감에 넘쳐, 전세계 흥행기록을 세운 ET의 판권을 영화사로부터 터무니 없이 비싸게 사오면서 실질적인 게임 개발 예산을 줄였고, 그로 인해 게임의 질이 많이 낮아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많은 량의 카트리지를 생산했다. 또한 그 당시 전자오락실에서 인기가 많던 팩맨을 가정용 게임기 버전으로 대량 생산하는 등 연이어 무리한 사업 계획을 세워 진행했다.

이렇게 맞이한 1982년 크리스마스 판매 경쟁에서 아타리는 30억 달러의 시장 규모를 예측해 유통하지만 아타리 2600 VCS 시장은 이미 완전히 붕괴된 후였다. 당시 실제의 시장은 1억 달러 미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결과 상당수의 재고를 떠안고 도산하는 소매점들도 속출했고, 그 이후 북미판 패미컴(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이 발매될 때까지 미국 게임 시장은 침체기에 들어섰다.



▲ 1977년 출시된 아타리의 가정용 게임기, Atari 2600 VCS



'제2부: 비디오 게임계의 부활과 최초의 국산 게임'을 기약하며..

사람의 즐기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컴퓨터 게임은 또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상업화된 게임 산업으로 발전했다. 물론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기 마련, 아타리 쇼크라는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서 게임계에는 수많은 일들과 변화가 생기게 된다.

한편, 국내에서는 전자 오락실을 통해 일본의 다양한 아케이드 게임이 들어오면서 게임 열풍이 일어나기 시작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게임들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또 다른 게임의 역사를 써나가게 된다.

※ 이어서 1982년이후, 아타리 쇼크를 극복한 세계 게임 시장의 이야기와 더불어 국내 게임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국내 게임 산업의 태동에 대해서 정리할 예정입니다.

Inven KyumZ - 김상겸 기자 (kyumz@inven.co.kr)
http://webzine.inven.co.kr/news_view.php?gidx=0&n=18219&rurl=%2Fnews_main.php%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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