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회의 형성

 | Legend
2008. 7. 4. 17:36

중세의 생활

중세는 두 개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었는데 그것은 봉건제도와 카톨릭교였다. 이 두 체제에는 여러 신분들이 각기 순서 있는 상하 관계를 이루면서 형성되어 있었다. 봉건제 하에서는 국왕, 제후, 기사, 농민의 신분이 있었고, 카톨릭에서도 역시 교황, 대주교, 수도원장, 주교, 일반 사제의 순으로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들 신분을 크게 구분해보면 제후, 기사, 성직자는 지배층이고 주민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농민만이 지배를 받는 측이었다. 그러면 그중 대표적인 신분인 농민, 성직자, 기사를 중심으로 당시 중세의 생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농민 : 당시의 농민은 상층계급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먹을 것을 대주고 그들이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반면 그들의 생활은 소박하고 풍족지 못했다. 또한 신분의 차이에서 생기는 멸시도 많이 받았다.
일례로 프랑스의 어느 서사시에 묘사된 농민의 모습은 이런 경우를 잘 보여준다.

거대한 손발, 넓은 어깨와 불룩한 가슴, 손바닥만한 넓이의 양미간, 넓적한 코, 누렇고 기다란 이빨, 시커멓고 뻣뻣이 선 머리털, 석탄처럼 시커먼 얼굴...

그런데 사실 농민에게 있어서 이러한 명시적인 대접보다도 현실적으로 더욱 고통을 준 것은 무거운 각종 세금과 부역(중세 농민은 영주의 토지를 빌어쓰는 대신 영주의 직영지의 농사를 의무적으로 지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3~4일 정도 영주를 위해 일을 해주었는데 이것을 부역이라고 한다)이었다. 노르망디 지방의 한 수도원의 기록을 보면 그 부담이 어떠했는지 알만하다.

5월에는 영주의 풀밭을 깍고 건초를 헛간에 나른다. 그 다음에는 도랑을 치운다. 8월에는 곡물을 거둬들이는 부역을 해야 하고 9월에는 돼지세를 바쳐야한다. 돼지 중에서 가장 좋은 두 마리는 영주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한 마리당 각각 세금을 내야 한다. 10월에는 고정적인 지대를 지불하여야 한다. 겨울이 다가오면 겨울 농사에 대비하는 대대적인 부역이 행해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케익과 암탉을 바쳐야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세를 내고 농사에 필수적인 시설을 이용하는 사용료도 내야 했다. 예를 들어 당시 방앗간은 거의가 영주의 소유였기 때문에 밀가루를 빻거나 빵을 굽는 솥등을 빌릴 때에는 어김없이 세금을 지불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어떤 지방에서는 영주가 초야권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들이 결혼하게 되면 신부가 첫날 밤에 신랑에게 가지 않고 영주에게 가서 첫밤을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무거운 부담 때문에 도시로 도망가는 농민이 많이 생겨났으며 나중에 농촌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성직자 : 중세의 농민들이 비참한 생활조건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기록들은 많이 남아 있는 편이지만 일반 성직자들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적다. 교황이나 수도원장 같은 거물급의 성직자들에 대한 기록은 많이 알려져 왔으니 마을을 담당하는 말단 성직자인 사제(司祭)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는 것이다.
중세에 있어서 사제의 위치는 그들이 고해성사, 결혼, 장례 등 일체의 일상적인 일들을 담당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했다. 이러한 사제들 중에는 인간의 영혼구제보다 어리숙한 농민들의 눈과 귀를 속여서 치부에 목적을 둔 사이비 진리들을 늘어놓는 경우도 많았다
사제들의 타락현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의사, 변호사, 서기 심지어는 상업이나 금융업까지 겸해서 돈벌이에 열중하는 사제도 있었다. 또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는 자는 보통이었고 여자까지 얻어 살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11세기 경부터는 이러한 타락을 고치려고 유럽 각지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정화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회의 타락상은 기독교의 최고 우두머리인 교황의 타락과도 밀접하게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이 정화운동은 주로 교황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수도원의 경우데도 원장과 평수도사 사이에 종종 분쟁이 일어났다. 물론 원장이 훌륭하면 그러한 일이 없겠지만 원장이 재물을 밝히고 공명정대하지 못할 경우에는 수도원의 재정에 어려움을 가져오고 따라서 청빈을 목표로 삼는 수도원 내부에 내분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는 수도원장이 살해된 경우가 6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수도원의 재정의 어려움은 수도원장의 사치뿐만 아니라 수도원의 자선사업 때문이기도 하였다. 여행자를 접대하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일은 원래 수도원이 사회에 베푸는 봉사중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교통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던 9~10세기 경에는 여행자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고 매일 빈민구제를 위하여 빵을 1만 5천개씩 구워야 했고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소 한마리를 잡아서 야채와 함께 요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도원의 지출이 엄청나게 많아지자 각처의 수도원은 재정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기사 : 기사들은 중세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신분으로 이른바 '중세의 꽃'이었다. 왕이나 영주와 계약을 맺어 충성을 맹세하고 대신에 특권을 부여받는 이들 기사는 처음에는 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이는 전사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면서 전쟁이 적어지자 그들은 사냥과 토너먼트 경기 등 오락적인 무예를 즐기게 되었다.
기사는 누구나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귀족의 아들이 7,8세가 되면 궁정에서 살면서 기사로서의 교육과 훈련, 그리고 예의범절을 배우게 된다, 어려서는 영주 부인의 시동으로 봉사하면서 예의범절, 악기연주, 노래 등 싸움과는 무관한 재능을 닦는다. 14,5세가되면 말의 사육으로부터 무술연마에 이르기까지 기사로서 필요한 군사훈련을 받고 20세가 되면 기사 서임식을 통하여 완전히 독립된 기사가된다.
기사의 주된 임무는 전쟁이었다. 영주들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충성의 표시로 전쟁에 참여하여 용맹을 발휘한다. 기사에 있어서 전쟁은 이길 경우에 막대한 전리품이 생기는 사업이며 전투는 일종의 즐거운 경기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기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용맹과 충성과 신의 였다. 반면에 비겁과 배신은 가장 큰 악덕이었으며 폭력이나 적에 대한 잔혹성 들은 그렇게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기사도 정신은 그 한참 이후에 정착한 것이고 초기의 기사들의 생활이나 기질은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거칠고 사나운 것이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절에는 주로 토너먼트 경기와 사냥으로 소일하였다. 토너먼트 경기라는 것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긴 창을 들고 말을 달려 서로를 찌르는 경기였다. 약간의 규칙은 있었지만 실전이나 다름없어서 상처를 입고 죽는 사례도 있었다. 또 전쟁에서처럼 포로가 되면 말과 무기를 빼앗기도 몸값을 지불하고야 자유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기사의 입장에서 보면 토너먼트 경기야말로 전쟁 다음가는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기기만 하면 수입도 좋았고 용맹을 떨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토너먼트 경기는 많은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열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력한 영주의 결혼식이나 그 아들의 기사 서임식 같은 때에 주로 행해졌다. 나중에 경기가 위험하고 기사들이 이 경기에만 너무 열중해서 신앙을 소홀히 할까 우려한 교황이 이를 금지시켰지만 기사들간에는 여전히 큰 인기를 누렸다. 현재 운동경기에서 사용하는 토너먼트식 게임이란 바로 여기서 유래하는데 모든 팀이 한번씩 경기를 갖는 리그전과는 달리 기사들의 토너먼트 경기처럼 한번 싸우면 죽거나 부상당하여 다시는 싸울 수 없기 때문에 한번의 경기로 탈락하는 경기방식을 의미하게 되었던것이다.
기사들이 토너먼트 다음으로 즐긴 것은 사냥이었다. 그들은 사냥에 너무 빠져 다른 영주의 땅에 침범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고, 농민들이 농작물을 해친다고 짐승을 죽이면 살인죄로 농민을 처형하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중세의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중 여성관계를 빼놓을 수는 없다. 기사들의 연애란 젊은 기사와 귀부인의 정신적 애정관계가 대부분이었다. 귀부인이란 주로 자신의 영주부인이나 그의 친척일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육체적인 결합이 아니라 신비한 정신적인 결합이었다. 그래서 중세에는 기사들의 사랑을 읊는 아름다운 시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귀부인에 대한 이러한 존경심으로 인해 후에 신사도를 뜻하는 기사도 정신으로 발전하였다.
구체적으로 기록에 나타난 기사들의 연애를 살펴 보면 무척 솔직하고도 재미있다. 먼저 영주의 예쁜 딸들은 아버지의 성을 찾아오는 기사들을 접대하는 일을 담당하기 마련이었다. 기사가 손님으로오면 갑옷을 젓는 일, 침실과 목용탕 정리 등을 직접하고 더 나아가서는 손님이 푹 쉴 수 있도록 안마까지 해 주었다. 사실 이런 일을 하면서 처녀가 늠름한 젊은이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12세기 말에 프랑스 서사시 <아미와 아밀>에 보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밀이라는 젊은 기사가 카를 대제의 궁정에 초대되어 가자 카를 대제의 딸인 아미는 아밀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아밀에게 애정을 고백하게 되는데 상당히 노골적이다.
"당신만큼 멋있는 남자는 세상에서 처음 봅니다. 언제든지 저를 당신의 침대로 불러 주세요. 나를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그러나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강한 아밀은 아미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하지만 사랑의 열기에 들뜬 아미는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밤에 침대에 누워 있는 아밀을 훔쳐보고,
"저렇게 훌륭한 사내를 보고도 그의 침대에 들어가기 싫어 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저 늠름한 가슴밑으로 파고들고야 말겠다. 누가 뭐라고 하면 아버지가 시켰다고 꾸며대지."
깊은 밤 아미는 아밀의 침실에 살그머니 들어가서 아밀의 가슴속에 파고 들었다. 놀라 눈을 뜬 아밀이 말했다.
"한 밤중에 내옆에서 자려고 하는 자가 누구이냐? 네가 만약 결혼한 여자이거나 왕녀이면 여기서 자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렇지 않고 네가 천한 종이라면 여기서 자도 좋다. 내일 아침에 몸을 바친 대가로 돈을 지불하면 되니까..."
약간은 과장된 서사시이겠지만 당시 기사들의 연애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중세의 사랑이야기 중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학자인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의 뜨거운 이야기이다. 엘로이즈는 많은 여자 승려를 거느린 유명한 여자 수도원장이었다. 편지를 통한 엘로이즈의 대담한 사랑 고백은 당시 기사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행한 상류 부인이나 미혼 여성들의 서글픈 사랑 편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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